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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정치

친일파를 친일파라 부르지 못하고. 조병옥

by armanianio morococha 2006. 9. 16.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이가 살아가던 세상에서나 만큼 아직 세상이 별반 달라지지 않은가 보다.

민주당 조순형 의원이 부친인 유석 조병옥 박사를 친일파로 거론한 동국대 강정구 교수를 ‘사자(死者)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가 무혐의 처리된 사건을 대검찰청이 다시 수사하도록 서울중앙지검에 지시했다.

대검 관계자는 “강 교수의 발언이 학문적 영역에서 이뤄졌는지 등에 대해 좀더 법리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재기수사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대검찰청이 다시 수사하도록 한것은 이해 할수가 없다. 세간에서도 대체로 받아들이는 조병옥의 행적에 대한 비판을 강정구 교수가 다시금 했다고 해서 다시 수사하도록 지시하는지.

정치권에서의 압력에 굴복하는 대검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실망만 안겨줄 뿐이다.

강정구 교수를 고소한 조순형 의원에 대해서는 도리라는 면에서 이해 될 부분이 있다.

조병옥 박사가 살아온 행적을 쭉 살펴 봤다.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을 만큼의 독립, 항일 인사로 써진 글들이 대부분이 었지만, 이런 글에서 조차 시대 상황상 친일의 흔적이 보였다.

조병옥은 1894년 천안에서 태어나서 공주 영명중학을 거쳐 평양의 4년제 숭실중학을 마치고 서울로 왔다.
배제전문학교(연희전문의 전신)에 입학한다. 부친으로부터 3000원을 지원 받아 미국으로 떠난다. 와이오밍고등학교에 컬럼비아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하여 1922년에 졸업한다. 같은 대학원에서 1923년 경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계속 공부해 1925년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5년 유석은 귀국 후 연희전문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하다가 YMCA 일을 맡아 이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조병옥은 1927년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과 함께 신간회를 창립, 발족하는 데 적극 참여하여 중앙본부의 재정총무 겸 경성지회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신간회 간부들은 1929년에 발생한 광주학생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후 일제의 광주학생에 대한 부당한 탄압에 항의하고 한·일 민족간의 차별로 인한 인도주의적 인권옹호를 주장, 민중대회를 준비하다가 일제의 탄압을 받아 3년간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신간회는 해체됐다.

친지의 권유로 경영난에 봉착한 조선일보를 살리기 위해 경영권을 인수, 조만식(曺晩植)을 사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전무 겸 영업국장을 맡아 8개월간 일한다. 그러나 경영난은 계속되었고 조선일보의 경영자를 물색하던 중에 계초(啓礎) 방응모(方應謨)와 연결되어 그에게 경영권을 넘기게 되었다. 조병옥은 조선일보에서 나온 후 광산을 경영하게 된다.

방응모가 광산 경영으로 때돈을 벌고 결국 조선일보 경영권을 가지게 되고, 방응모에 이어 조병옥이 광산 채굴에 뛰어 들었다.

방응모, 이광수, 주요한, 유치호 등과 친분이 가까웠고, 행동도 함께한 조병옥 이었다.

1941년 8월25일 삼천리사 주최 임전대책협의회에서 발언내용이다.

우리는 오늘 제국의 신민으로서 이 마당에 모였습니다.
전 세계를 통하여 역사적 드라마가 전개되는 현 단계에 있어서 유사 이래 처음 위급존망지추에 입각한 제국의 위정자로서는 조선인이 과연 절대적으로 제국신민으로서 현하 국책에 협동하느냐 않느냐 함에 있어서 조선민중에 대해서 듣고 싶은 대답이 많을 줄 압니다.
(…)그러나 조선민중은 아무 요구도 없이 무조건으로 협동하여 전승해서 동아공영권 건설에 매진함으로써 위정자에게 안심을 줄 것입니다.
(…)성전이 관철된 뒤의 전쟁은 민족적 투쟁에 있는데 그것은 세계를 이분하여 백색인종과 유색인종의 투쟁인 것입니다. 요컨대 이 모임의 목적은 조선민중으로 하여금 제국신민으로서 국책에 절대 협력할 것, 그리하여 위정자로 하여금 안심케 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병옥의 치밀한 친일 행위는 지금도 그를 항일 인사로 기억되게 하고 있다.

해방후에 조병옥은 미군정 경무부장이 되었다. 제주 4.3 사건의 사실상 진두지휘하였다. 그는 양민 학살의 책임자였다.

조병옥은 한국전쟁 기간에 이승만 정부에서 내무장관을 맡았다. 그러나 거창 양민학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과의 의견충돌로 사임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조병옥은 반독재운동 야당의 거목으로 모습을 바꾼다. 결국 이승만과의 건국이후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후 자연스레 이승만을 비난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 떠밀려 이뤄진 수순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1955년 조병옥은 사사오입 개헌파동 후 야당 통합운동을 통해 발족한 민주당 간부 중에서 구파의 주요 간부였다. 1958년 11월 26일 서울 시공관에서 치른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 장면을 누르고 대통령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조병옥은 급서했다.

아들 조윤형씨와 조순형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였다. 조윤형씨는 작고했다.

댓글2

  • 각계 2016.12.17 14:09

    첨에는 민족운동쯤하다 뜨거움에 덴뒤에 친일의 탄탄대로로 간 인사에 기회주의자 거기다 이놈의손에 죽어간 제주시민들이 넘 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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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던 남자 2017.09.09 15:07

    그래 그런 분이 민주당 설립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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